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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공원] 씨사이드파크 영종진

  • 작성자
    영종사업단(영종사업단)
    작성일
    2017년 7월 11일(화) 10:50:04
  • 조회수
    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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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사건

[雲楊號事件(운양호사건) ]

 

186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이 잠재되어 있다가(정한론 征韓論), 다시 고개를 들어 일본은 단계적 침략 전략을 가지고 조선에 접근하였다. 당시 국제사회는 제국주의가 팽배해 있던 시대로, 강대국이 무력을 앞세워 후진국을 압박하여 개항을 유도하거나 침략하는 사례가 많았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포함외교(砲艦外交 포함을 앞세운 무력시위로 상대국을 압박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강제적 외교 수단)에 바로 굴복하고 개항(개국)하였다. 그 후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 개혁을 단행한 후, 일본은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양이정책(攘夷政策 오랑캐를 배척하는 정책)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개국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한편,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를 좀 더 신속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포함외교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운요호(雲楊號)사건이다. 일본은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인 운요호를 부산에 침투시켰다. 이에 부산훈도 현석운(玄昔運)이 부산의 왜관(倭館 일본의 상관이 있고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찾아가 군함을 침투시킨 이유를 묻자 운요호 함장은 조선과의 수교 교섭이 지연되는 이유를 일본의 이사관에게 물으러 왔다고 거짓으로 설명하고, 오히려 현석운를 군함에 승선시켜 함포사격 훈련을 구경시키는 등 군함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그들은 조선 해안을 탐측하고 연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구실을 대었다. 운양호는 동해안을 순항하고 다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앞 난지도에 도착하였다(1875. 9. 20).

운요호의 함장 이노우에는 일본군 수십명을 데리고 담수 보급의 명목으로 작은 보트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하였다. 이때 해안 경비를 서고 있던 조선 수병은 예고도 없이 침투하는 일본군 보트에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일본군은 모함으로 되돌아가, 함포로서 조선에 보복 포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영종진(永宗鎭 오늘날의 영종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과 격전을 벌여, 근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무기도 다량 탈취하였다. 그리고 주민에 대한 방화, 살육을 하고 퇴각하였다.

그 후 일본은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하며 나타나,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통상을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인 1876226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였고, 조선은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되었다. 강화도(江華島)는 한강 어귀에 위치하여 외세가 서울(한양)에 접근하는데 가장 가까워 서울 위협을 위해 강화도를 침범하는 사례가 많았다.

운요호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의도적으로 일으킨 포함외교의 한 형태이며, 이는 그들이 22년 전에 미국에 당한(배운)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국력이 약한 결과 불법침입자에 대한 정당한 방어적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 책임을 조선에 묻고 강제로 수교하였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 대륙침략의 단초(端草)였으며 신호탄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요호사건 [雲楊號事件(운양호사건)]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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